"왕가위 감독의 영화에는 대사가 많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더 어려워요.
말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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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화양연화 개봉 당시 Time Asia 인터뷰]

홍콩 영화 황금기를 대표하는 여배우 장만옥(張曼玉). 1983년 미스홍콩 대회 준우승을 시작으로 연예계에 입문한 그녀는, 오늘날 알려진 대부분은 홍콩 배우의 등용문이었던 TVB 드라마를 거쳐 영화계로 진출했다. (*주성치,양조위,유덕화도 TVB에서 연기수업을 받고 데뷔했다.)
왕가위 감독, 장국영, 양조위 등 홍콩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들은 홍콩 '최고의 여배우'로 장만옥을 손꼽았다. 특히 왕가위 감독은 "장만옥은 카메라가(어쩌면 본인이) 사랑하는 배우"라며 평했고 이후 아비정전(1990)과 동사서독(1994),화양연화(2000)까지 약 10년에 걸쳐 자신의 대표작에 여주인공으로 낙점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 영화에서의 장만옥이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왕가위 감독의 연출감각과 장만옥의 외모가 최전성기였던 시절이기도 했겠지만 장면마다 감독의 사심이 담겨서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까 싶다.
지정학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깊게 편승할 수 밖에 없었던 홍콩영화의 찬란했던 시대는 이제 없지만, 지금도 기억되고 있는 홍콩 배우들은 그만큼 장르적 부침을 견뎌냈던 사람들이다. 장만옥 또한, 로맨스부터 무협, 느와르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펼쳐왔기에 우리는 지금도 장만옥의 시절을 추억할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한 그녀의 아름다움과 연기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2000)
1962년 홍콩의 좁은 아파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천천히 그러나 강렬하게 진행된다. 신문사 편집장 리핑과 차우는 각각 배우자가 있는 이웃 사이다.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남편과 과다한 야근으로 늦게 귀가하는 리핑의 아내. 두 사람은 점차 자신들의 배우자가 서로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은 어떻게 그들이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관계를 연기하며 재현해보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도 모르게 서로에 대한 감정이 깊어진다. 영화는 당시 보수적이었던 홍콩 사회에서 억눌린 감정을 지키려 노력하는 두 사람의 고뇌를 섬세하게 담아낸다.

특히 장만옥은 치파오를 갈아입을 때마다 달라지는 미묘한 감정선의 변화를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좁은 골목길에서의 스침, 식당에서의 저녁 식사, 비 오는 밤거리의 산책. 이 모든 장면에서 리핑의 절제된 몸짓과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과 사랑을 전달한다. 영화는 결국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홍콩의 한 시대를 완벽하게 담아냈다.
"이런 심정이었을까요? 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 소려진 (장만옥)
"다음 생에는 더 일찍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 소려진 (장만옥)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
양조위 : 홍콩 영화에는 양조위라는 장르가 있다.
"나는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촬영이 없을 때도 캐릭터의 습관과 생각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메소드 연기다."-양조위 | Variety Asia,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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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밀밀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
1986년부터 1996년까지의 홍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홍콩과 중국 본토, 그리고 뉴욕을 오가는 서사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근대화되는 중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이요(장만옥)는 맥도날드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같은 처지의 여명을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변화를 맞이한다. 홍콩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이요는 점차 야망을 이루어가지만, 그 과정에서 순수한 사랑을 잃어간다. 테레사 텡의 노래 '첨밀밀'처럼 그들의 관계는 달콤쌉싸름하게 이어진다.

장만옥은 생존을 위해 야망을 품어야 했던 이주 여성의 모습을 리얼하게 연기하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여전히 순수한 감정을 간직한 복잡한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다. 홍콩의 주권반환을 앞둔 시기의 불안과 기대, 변화하는 도시 속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작품은 홍콩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람은 돈이 있어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 이요(장만옥)
"홍콩에선 감정을 가질 여유가 없어" - 이요(장만옥)
아비정전 (Days of Being Wild, 1990)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장만옥이 연기한 *소려진은 길거리 소다 판매원이다. (*소려진은,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이 연기한 캐릭터와 이름이 같다.) 우연히 만난 아비(장국영)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의 방황하는 삶과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인해 상처받는다.

왕가위 감독은 당시 홍콩의 젊은이들이 겪는 실존적 고민과 방황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특히 시계 가게에서 유적과 1분을 함께 보내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소려진은 사랑에 빠졌다가 상처받고, 그 상처를 극복하며 성장해가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만옥은 소려진의 순수한 첫사랑과 그로 인한 상처,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성장을 자연스러운 감정선으로 표현해낸다.

영화는 방황하는 청춘들의 모습과 함께 식민지 시대 홍콩의 정체성 문제도 함께 다루며, 단순한 멜로드라마를 넘어선 깊이 있는 서사를 보여준다. 특히 아비의 자기중심적인 사랑과 대비되는 소려진의 순수한 사랑은 영화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왕가위 감독과 장만옥의 첫 번째 협업작품으로, 이후 그들의 오랜 파트너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1분이면 충분해요. 이 1분만큼은 우리가 함께였다는 걸 기억할 수 있으니까" - 소려진(장만옥)
"사랑은 시간이 약이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예요" - 소려진(장만옥)
[이 작품에 함께 출연한 배우]
장국영 : 찬란했던 아시아의 별
"모든 캐릭터에는 나의 일부가 있어요. 그리고 모든 캐릭터는 내 안에 영원히 살아있죠."-Hong Kong Film Archive 인터뷰, 1993년 1956년 9월 12일 홍콩에서 태어난 장국영은 '아시아의 슈퍼스타'라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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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Ashes of Time, 1994)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이 무협 영화에서 장만옥은 구양봉(장국영)의 형수이자 한때 사랑했던 자애인(장만옥)을 연기한다. 사막 속 객잔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과 복수, 그리고 운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자애인은 주인공 구양봉(장국영 분)의 옛 연인으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지만 구양봉의 야망과 자존심으로 인해 결합하지 못하고, 그녀는 결국 그의 형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 인해, 구양봉은 냉소적이고 고독한 인물로 변모한다. 자애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구양봉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지만, 매년 봄이 되면 찾아오는 그를 기다린다. 자애인은 억눌린 감정과 그리움, 한과 체념이 뒤섞인 복잡한 내면을 섬세한 눈빛 연기로 표현해낸다.

특히 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회상 신은 왕가위 감독 특유의 시적인 영상미와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전통 무협 영화의 틀을 깨고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과 욕망을 탐구하는 이 작품에서, 장만옥은 무협 장르에서도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촬영에만 2년이 걸렸으며, 2008년 왕가위 감독이 'Ashes of Time Redux'라는 이름으로 재편집 버전을 공개했다. 장만옥은 이 작품을 위해 무술 훈련을 받았으나, 감독은 오히려 그녀의 섬세한 감정 연기에 초점을 맞추어 촬영했다고 한다. 실제로 장만옥의 무술장면은 거의 안나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싶다면, 천천히 세어보세요. 하나, 둘, 셋..." - 자애인 (장만옥)
"매년 이맘때가 되면 난 그를 기다려요. 이제는 기다림 자체가 습관이 되었죠." - 자애인 (장만옥)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
양조위 : 홍콩 영화에는 양조위라는 장르가 있다.
"나는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촬영이 없을 때도 캐릭터의 습관과 생각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메소드 연기다."-양조위 | Variety Asia,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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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 찬란했던 아시아의 별
"모든 캐릭터에는 나의 일부가 있어요. 그리고 모든 캐릭터는 내 안에 영원히 살아있죠."-Hong Kong Film Archive 인터뷰, 1993년 1956년 9월 12일 홍콩에서 태어난 장국영은 '아시아의 슈퍼스타'라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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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옥이 남긴 유산
홍콩영화평론가협회가 선정한 '홍콩 영화 100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여배우로는 유일하게 5위에 선정된 장만옥. 그녀는 여전히 현역 배우로 활동하며, 예술가이자 제작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젊은 여성 창작자들을 위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열어주고 있다.
"연기는 인생처럼 끝없는 여정이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장만옥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40년이 넘는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단순한 영화 목록이 아닌, 아시아 영화의 한 시대를 기록한 예술적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그녀는 차기작으로 신예 감독의 실험적인 작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변함없는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영화사를 써내려가는 장만옥. 그녀가 앞으로 보여줄 새로운 모습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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